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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민화의 뿌리, 문배門排

민화의 시원을 확인하는 작업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민화의 주요 제재 가운데 일부는 문배 풍습이나 문신 풍습이 알려지기 전부터 인식의 공통성에 의해 다양한 용도로 제작,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민화의 뿌리를 알지 못하면 그 실체와 발전과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으므로 민화 시원의 여러 갈래 중, 민화와 직접적인 영향관계를 맺고 있는 문배 풍습을 다음과 같이 추적, 확인, 정리해 놓는다.
글 김용권 (겸재정선미술관 관장)
현재 학계에서는 민화의 시원을 크게 둘로 나누어 고찰하고 있다. 하나는 우리 민족 고유의 문배 풍습에서 세화로 그리고 민화로 변모되었다는 견해이고, 또 다른 하나는 중국의 문신에서 민간연화로 이어져 오면서 영향을 받았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민화의 시원을 확인하는 작업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민화의 주요 제재 가운데 일부는 문배 풍습이나 문신 풍습이 알려지기 전부터 인식의 공통성에 의해 다양한 용도로 제작,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즉 민화는 조선후기에 와서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지만, 그 시원으로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문배 풍습과 부적 사용 그리고 병풍 사용과 중국의 문신 풍습 등을 들 수 있다. 나아가 우리 민족의 자연신앙(샤머니즘, 토테미즘)과 무교를 비롯한 외래 종교인 음양오행사상, 유교, 불교, 도교 등도 세화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도1). 이와 같은 이유에서 김원용(金元龍, 1922-1993)은 “민화는 한 민족의 사상, 신앙, 세계관, 인생관, 예술관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라고 말하였다.
따라서 세화의 시원을 명확하게 고증하는 데엔 절대적인 어려움이 따른다. 그럼에도 민화의 뿌리를 알지 못하면 그 실체와 발전과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민화 시원의 여러 갈래 중, 민화와 직접적인 영향관계를 맺고 있는 문배 풍습을 다음과 같이 추적, 확인, 정리해 놓는다.


도1 예로부터 마을의 수호신으로 받들던 장승




(좌) 도2-1 복조리 Ⓒ한국학중앙연구원·유남해
– 음력 정월 초하룻날 새벽에 부엌이나 벽에 걸어놓는 조리. 그해의 복을 조리로 일어 얻는다는 뜻으로 걸어놓았다.
(우) 도2-2 잡귀를 쫓고자 대문 앞에 벽사적 의미의 글자를 붙여놓은 모습

범뼈에서 문배門排에 이르기까지
문배는 벽사辟邪와 제액除厄을 막는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제작된 그림을 말한다. 즉 문배는 사악한 기운을 막고 액을 제거하기 위해 대문에 붙이는 그림이다. 이와 같은 문배는 민화와 서로 뗄 수 없는, ‘문배門排→세화歲畵→ 민화民畵’로 연결되는 순차적인 전후 관계를 맺고 있다.
처음에는 짐승의 피를 출입하는 문이나 벽에 바르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닭 또는 개의 피를 문에 바르다가, 점차 닭의 머리[鷄頭]나 호랑이 뼈 등을 걸어두는 것으로 벽사 행위를 확장해갔다. 이와 함께 보조적으로 문 위 한 곳에 엄나무 가지 다발, 빗자루, 복조리, 복숭아나무 가지, 버드나무 가지, 소나무 가지, 쑥다발 등을 올려놓거나 걸어두었다. 예컨대 엄나무 가지 다발을 걸어두게 된 것은, 굵은 가시가 촘촘하게 돋은 것을 보면 잡귀가 겁이 나서 달아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빗자루를 걸어두게 된 것은, 집에 해가 되는 것이 들어오면 바로 빗자루로 쓸어버리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문배 풍습은 바로 위와 같은 문 앞에 다양한 사물을 설치하거나 걸어놓은 방식이 뼈대가 되어 생겨난 것이다. 생각해보면 모두들 범뼈를 걸어 놓고 싶었지만 범뼈는 금값에 버금갔기 때문에 이를 구하지 못하는 집에서는 엄나무 가지 다발, 빗자루, 복조리 등 다양한 보조적인 장치로 대신했을 것이다(도2-1, 도2-2). 그러나 범뼈만이 큰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는 집에서는 어쩔 수 없이 ‘범 그림’이나 범과 관련된 ‘글귀’, ‘부적’ 등으로 대신하여 잡귀를 쫓고자 했을 것이다. 벽사 그림이나 글귀, 부적은 복을 빌기에 아주 편리하였으므로 자연스럽게 이를 계속 사용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단군상〉·〈처용상〉· 〈비형랑상〉 등과 같은 그림을 붙여서 악운을 쫓고자 하는 문배 풍습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도3 <단군도>, 조선시대, 110×182㎝,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 〈단군상檀君像〉
통일신라시대(8세기)의 화승畵僧인 신필神筆 솔거率居가 그린 〈단군상〉은 벽사적인 상징성을 담고 대대세세로 줄기차게 전승되어왔다. 즉 통일신라시대의 〈단군상〉은 조선후기까지 그대로의 단군 모습과 여러 산신 모습으로 변모되어 일반 여염집에 걸렸다(도3). 이에 대해 조자용은 “통일신라시대의 솔거가 그린 단군 초상화의 양식과 민화 산신도는 일맥상통한다”라고 말했다.
통일신라시대의 솔거가 그린 〈단군상〉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삼국유사》에서 찾을 수 있다. 기록에는 “어느 날 솔거가 꿈속에서 단군을 만났는데, 그 모습이 너무도 생생하여 단군의 얼굴을 천여 장 남짓 그려 신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붙이도록 했다”라고 적혀 있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국조 단군께서는 구월산에서 돌아가시고 그 산의 산신이 되셨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8세기경 대야발大野勃(생몰년 미상-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의 동생)이 쓴 《단기고사檀奇古史》에도 “기원 일천여년 전에 〈단군상〉을 그려 신전에다 봉안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우리 선조들은 시조인 단군과 산신을 일체로 봤으며 그런 이유로 더욱 각별하게 숭배하며 그려 모시거나 벽사의 의미를 담아 사용했음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 선조들이 ‘단군 초상화’를 그려 붙이거나 신전에다 봉안했던 것은, 단군이 우리 민족의 시조로 당연 모시게 된 이유도 있었겠지만, 단군을 산신으로 숭배해 온 것도 적지 않게 작용했을 것으로 믿어진다(도3).
2) 〈처용상處容像〉
통일신라시대의 〈처용상〉 역시 문배의 시작이며 세화의 원조 격 그림이다. 즉, 조선시대 사람들도 통일신라시대 사람들처럼 문간에다 처용의 얼굴을 그려 사악한 귀신을 물리치고 경사스러운 복을 맞아들이는 일들을 했다(도4, 도5). 《삼국유사》에 따르면, 9세기 말(879년)인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재위 875-885) 때에 왕이 울산의 개운포開雲浦로 소풍 갔다.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덮여 어두워졌는데,



도4 성현·유자광 등이 왕명으로 조선시대의 의궤와 악보를 정리하여 편찬한 악서樂書 《악학궤범》에 묘사된 처용의 모습
왕이 이상하게 여겨 신하들에게 까닭을 물었다. 일관日官이 “이는 동해 용왕의 조화이오니 좋은 일로 풀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일관의 간언대로 동해 용왕을 위하여 절을 짓도록 명하자, 바로 구름이 걷히고(그래서 이곳을 개운포라 했음), 용왕이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나와 음악을 연주하며 춤을 추었다. 그중 한 아들이 왕을 따라 경주로 오니 그가 바로 처용이었다. 왕은 그를 신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시켜주고 급간級干 벼슬을 주었다. 그런 어느 날 처용 아내가 대단히 아름다워 역신疫神이 흠모한 나머지 사람으로 변신해 동침하였다. 이때 밖에서 달구경을 하고 돌아온 처용은 두 사람이 누워 있는 것으로 보고 아래와 같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동경東京 밝은 달에 새도록 노니다가 들어, 내 자리를 보니 가라리 네히로세라
아으 둘은 내해 어니와 둘은 뉘해어니요. 본디 내해지만 뺏겼으니 어찌하리꼬.”

이에 역신은 제 모습으로 드러내고 앞에 꿇어앉아 빌며, “내가 당신의 아내를 사모해 잘못을 저질렀으나 당신은 노여워하지 않으니 감동하여 아름답게 여긴다. 맹세코 이제부터는 당신의 모양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 안에 들어가지 않겠다”라 말하고는 사라졌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백성들은 처용의 모습을 그려 문간에 붙여 귀신을 물리치고 경사스러운 일을 맞아들였는데 그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화를 내지 않고 있으니 역신이 감동하여 금후로는 맹세코 처용의 형용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노라 하였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처용상〉을 그려 대문에 붙이고 벽사진경辟邪進慶을 꾀했다.”




도5 <모란인물도>, 지본채색, 142×63㎝,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 서울 마포구 신수동福介堂에 안치되었던 그림으로 장지의 앞뒷면에 모두 그림이 있다. 한 면에는 탁자위에 모란꽃 화병이, 다른 면에는 처용으로 전하는 인물이 그려져 있다.


이렇게 통일신라 때에 사람들은 문간에다 처용의 얼굴을 그려 사악한 귀신을 물리치고 경사스러운 복福을 맞아들이는 일을 했다. 이는 문에 그림을 붙여 축역(逐疫, 역신이나 나쁜 전염병을 쫓아 버리는 일) 하고자 했던 가장 이른 기록으로, 우리 고유의 구역신區域神이자 문신門神인 동시에 민족적 벽사 풍습의 시작이라 할 수 있겠다. 홍선표는 “통일신라시대의 〈처용상〉은 신라의 구역신驅疫神이자 문신門神으로 사용되면서 문배류 그림을 발생시킨 그림이다”라고 말하였다. 정병모 역시 “문배는 민화의 시작이고, 그 문배 가운데 처용 문배가 첫머리에 해당한다”라고 말하였다.



도6-1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2015년 주미대한제국공사관에서 발견한 경복궁 광화문 사진(미국 의회도서관 소장) 19세기 말 경복궁 광화문에 금갑장군이 그려진 문배도가 붙여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도6-2 도6-1의 세부 모습


3) 〈비형랑상鼻邢郞像〉
6세기 말인 신라시대의 ‘비형랑설화鼻邢郞說話’ 역시 역신疫神을 막아 주는 풍습으로 문배의 시작으로 상정해 놓을 수 있다. 왜냐하면 ‘비형랑설화’는 《삼국유사》에 등장하는데, 조선전기 성현의 《용재총화》에도 아래와 같이 비형랑과 처용랑이 나란히 등장하고 있어서, 처용설화와 같은 맥락에서 비형랑 설화를 문배의 시원 중 하나로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풍속에 입춘날 여항의 인가에서 글[詞]을 붙여 귀신을 물리치고, 그림[像]을 붙여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것은 신라 시대부터 시작되었으니, 《삼국유사》의 비형랑鼻荊郞과 처용랑處容郞이 그것이다. 이는 진실로 우리나라의 고유한 풍속이었다.”

이렇듯 조선전기 성현의 《용재총화》에 신라시대부터 시작된 〈비형랑상〉과 〈처용상〉이 여항 인가에 붙여져 사악한 것을 물리쳤으며 이는 우리나라 고유한 풍속이라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 도화녀비형랑조桃花女鼻邢郞條에 따르면, 비형랑은 신라 25대 진지왕眞智王(재위 576~579)이 죽은 후에 귀신으로 나타나 사량부沙梁部에 살던 도화랑桃花娘과 관계를 가져 낳은 아들로, 그가 태어날 때에 천지天地가 진동하였다고 한다. 진평왕은 그 신기함을 듣고 비형을 궁중에 데려다 길렀으며, 비형랑 나이 15세가 되자 집사執事 벼슬을 주었다고 한다. 계속해서 비형랑은 보통 아이와 다르지 않았으나 밤만 되면 궁궐 밖 숲속에 가서 귀신들과 어울리며 놀았다. 그런 비형은 큰 개울에 돌다리가 있으면 좋겠다는 당시 사람들의 소원을 듣고, 귀신들을 동원하여 하룻밤 사이에 완성시켰으나 길달吉達이라는 귀신이 비형랑의 지시를 거역하고 여우로 둔갑하여 달아났다. 이에 비형은 다른 귀신들을 시켜 그를 잡아 죽였다. 이 때문에 귀신들은 비형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겁을 먹고 달아났으며, 당시 신라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을 알아차리고 아래와 같은 노래를 지어 불렀다.




도6-3 <안동 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 본가 소장 문배도>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경복궁관리소는 2021년 설 연휴 동안 조선시대 문배도 풍습에 착안하여 문배도를 광화문에 부착하는 행사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왕실과 연계성을 지니면서도 유일하게 완형이 남아 있는 안동 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 본가 수중 유물을 바탕으로 문배도 현수막을 제작했다.


“성스러운 임금의 혼이 낳은 아들인 비형랑이 머무는 방이 여기라오. 날고뛰는 온갖 귀신들아 아예 이곳에 얼씬도 하지 마라.”
신라 사람들은 위와 같은 노래를 부르며 비형랑 초상화를 그려 집집마다 붙여 잡귀를 쫓았는데 이러한 풍습이 후대까지 전통적, 인습적으로 이어져 사용되었던 것이다. 또한 한편으로 비형랑상은 차츰 문의 망網 형상과 가시 돋친 홰나무 가지로 대체하여 사용되는 전통으로도 이어졌다. 이와 같은 비형랑 초상화에서 파생된 망상(網狀, 망의 무늬)이 궁실과 여염집 그리고 사찰에서 귀신의 해코지를 막는 구실을 하였다.
살펴보았듯이 〈단군상〉·〈처용상〉·〈비형랑상〉은 문배로서의 제작목적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즉 통일신라시대에 집집마다 대문에 붙인 〈단군상〉·〈처용상〉·〈비형랑상〉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민화라 할 수 있겠다. 때문에 민화의 시원의 직접적인 실마리를 풀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사료라 할 수 있으며, 이와 같은 문배는 한국인이 만들어 낸 인물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끝으로 〈단군상〉·〈처용상〉 등과 관련된 기록은 9세기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최철崔喆을 비롯한 몇몇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처용이 문신門神의 화상畵像으로 정착된 시점을 9세기의 헌강왕 이전에 이미 크게 성행한 풍속으로 추정해 볼 수도 있겠다. 물론 아직까지는 확실한 기록이 드러나 있지 않지만, 앞서 언급한 6세기경인 고신라 시대에 형성된 ‘비형랑설화’는 고대의 문첩벽사습속과 관련된 신뢰할 만한 사료로 여겨지기에 계속 관심을 갖고 연구할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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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권 | 겸재정선미술관 관장
현재 (사)한국박물관협회 이사, 문학박사,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부설
아동미술연구소 고문, 한국민화국제교류협회 고문, 한국이지예술문화학회 이사,
(사)한국민화진흥협회 고문, 한국민화학회 운영위원, (사)한국박물관협회 이사이다.
총 42편의 학술논문을 발표했으며 문학박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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